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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사랑하며

좋아하는 것보다 유익한 것을 먼저 구하라


2009년 8월 2일 주일 낮 예배설교


성경:빌립보서 1:22-26


제목:좋아하는 것보다 유익한 것을 먼저 구하라


어느 전도사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주례 목사님께서 주례사를 통해 재미있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제 신랑은 곧 목사가 될 사람이니 신부는 자동적으로 사모가 됩니다. 목사의 길도 어렵지만 사모의 길은 더욱 어렵다고 봅니다. 수많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합니다. 여러 사람의 기준에 따라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외모를 가꾸면 사모가 사치하다’고 합니다. ‘외모를 가꾸지 않으면 초라하고 궁색해 보인다’고 합니다. ‘자녀를 챙기면 자기 애 밖에 모른다고 하고, 챙기지 않으면 너무 애들을 방치한다고 합니다. 사모가 너무 마르면 신경이 날까로워 보여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너무 살이찌면 둔해서 어리석어 보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모인 양은순 교수가 쓴 책 ‘억울함일까? 황송함일까?’라는 책의 일부입니다. 이 책은 ‘사모가 사모에게’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선배사모가 후배 사모들에게 전해주는 지혜와 격려와 위로의 책입니다. 사모가 된 여성들은 각자 자신의 자격이나 선택으로 사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는 한국교회에 없는 직분입니다. / 사모는 목사가 되어 주의 종으로서 일생을 살기로 결정한 남편 때문에 자동적으로(?)사모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되려면 오랜 기간의 수업을 받아야 하고, 몇 차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결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모가 되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결단이면 됩니다. 결혼의 결단입니다. 이것은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과 다름없는 공통적인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 결단 이후에 치루어야 할 대가는 다른 여성들과는 천지차이인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사모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헌데 많은 사모들은 억울함을 갖고 산다는 것입니다. 사모라는 자신의 위치와 삶에 대해서 "내가 사모가 된 것은 남편 탓이니 억울하다"라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헌데 이런 마음을 갖고 산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사모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사명을 재발견하면서 "내가 사모가 된 것은 주님 덕분이야! 목사인 남편 덕분이야! 황송할 뿐이지"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억울함으로 사는가? 황송함으로 사는가? 이것은 사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처지에 대해서 두 가지 마음을 갖습니다.


(본문)


사실 억울하기로 따지면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돌려 놓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기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인 방법으로 부름 받은 사람치고 펼쳐지는 삶은 전혀 기적적이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입니다. (적용)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때로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적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일상의 삶까지 매사가 기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적을 경험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아니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삶입니다. 놀라운 방법으로 부름받은 바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이었습니다. 오히려 핍박받고, 매 맞고, 죽을 고생을 하고, 결국은 매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속에서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 아래 내려왔으면 빨리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현실로 빨리 돌아와서 그 속에서 뜻과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쁜 것입니까? 거룩한 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헌데 복음을 전한 자의 삶이 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얼마나 억울함을 느낍니까? 헌데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억울하다기 보다 오히려 황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1.어떻게 바울은 억울함으로 일하지 않고, 황송한 마음으로 헌신했을까요? 이 답은 사람들이 삶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1)사람들이 삶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첫 번째 이유는 매사에 이해득실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예)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언제 억울하다고 느끼느냐?’고 물었습니다. 큰 아이는 ‘나는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했다고 누명을 쓸 때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동생이 잘못했는데 형이라고 같이 혼날 때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 작은 아이는 ‘오늘 해야 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또 숙제를 내줄 때 억울하답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얼마 못 먹었는데, 아빠가 큰 수저로 다 먹었을 때 억울하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억울하다고 느끼는 본 마음은 자기에게 손해가 될 때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것에 비해서 돌아오는 이익이 너무 적을 때 사람들은 억울해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억울함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아예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헌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랬다면 실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고 인내한다고 했습니다. 허나 장차 받을 영광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주신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용)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이 나누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헌신하고 충성한 것에 비해서 내가 너무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나를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왜 어머니들에게는 이런 억울함이 없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헌신하면서 이해득실을 따지는 부모들이 있습니까? 한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녀들에게 진정으로 존경을 받으려면 공로를 앞세우면 안됩니다. 부모님들의 진정한 권위는 희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헌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한테 해 준게 얼만데....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라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갖고 있으면 늘 억울합니다. 오히려 ‘고맙구나! 내가 뒤바라지도 제대로 못해주었는데, 이렇게 잘 자라주었으니 너무나 고맙구나! 엄마는 부족하고 배우지도 못했는데, 넌 잘 자라주었구나!’ 자녀들은 이런 부모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희생에서 오는 것입니다. (적용)이런 삶의 태도를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이해관계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삭막합니까? 이익이 되면 수고하고, 그렇지 않으면 발을 빼는 얄팍한 마음으로 살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적용해 볼까요?


왜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까?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야 구원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로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8-9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고귀한 생명까지도 내 주셨기에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을 가장 고귀한 능력의 이름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익에 따라서 행동하신 적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값없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아들을 내 주시고, 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한 것들을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적용)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내 주는 것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 주셨습니다.


(예)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내 놓은 것을 보면 압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내 놓았습니다. 독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러나 가장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내 놓았습니다. 또한 그 아들을 내 놓으면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유익이라는 말은 이익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자기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일로 하면 그 만한 보상이 없을 때 억울해서 못합니다.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합니다. 산상설교 중에서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라”는 것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주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은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익에 매인 종이라면 나는 절대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이익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이해타산으로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왜 사람들이 개척교회를 피하고, 기존교회로 간다고 합니까? 이해득실을 따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측량하지 못할 은혜와 지혜가 있습니다. 희생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2)또 삶이 억울하다고 느끼는 둘째 이유는 ‘내 인생이 남의 손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행복한 가정은 어떻습니까? 서로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서로를 만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만남을 후회합니다. 서로에 대한 원망이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내가 이 모양 이꼴이라고... 당신만 안 만났다면 내 인생도 괜찮아졌을 텐데...’ 인간관계에서 늘 남의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내가 이 모양이다. 사회와제도가 이래서 내가 억울하다.’


(성서적인 예)남의 손에 의해서 조종된 인생이라서 억울하다면 요셉만큼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형들이 강제로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종살이를 합니다. 또 자기는 진실하게 행동했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런 억울할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려울 때 도왔더니 술 맡은 관원장은 은혜를 잊어 버립니다. / 보세요. 자기 선택이라고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남들의 손에 의해서 조종을 받은 삶입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셉은 원망해도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억울해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일의 결말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남의 손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리고, 감옥에 갇힌 일들이 지나고 보니 바로왕을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목적지에 가장 빨리 오게 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조금만 길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너무 억울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 조금 멀리 인생을 보면 거기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습니다.


(성서적인 예)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 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 고백을 듣고 난 뒤에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젊은 양을 치라, 내 늙은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보다 참다운 제자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에 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헌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구속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단 한 순간도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기로 따지자면 바울만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바울은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스스로 섬김의 살고, 스스로 종된 삶을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살기보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지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이제 예수의 심장을 갖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니 살아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살지 않으면 안되는 주의 사랑에 끌려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2.둘째로 바울은 좋은 것보다 유익한 것을 먼저 구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이대로 죽을 수도 있고, 풀려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는 바울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다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은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매 순간마다 내게 좋은 것보다 하나님과 교회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구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둘은 죽어서 주님이 계신 천국에 가는 것과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일 /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일은 죽어 그리워하는 주님 뵙고, 주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적용)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든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다면 가고 싶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원하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입니다. 헌데 바울은 자기 자신보다 교회를 위하여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더 유익된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24절입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하나님과 공동체를 생각하면 아직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자기에게 좋은 일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더 유익한 일을 선택했습니다.


(예)사탕은 달콤하여 입에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약을 선택해야 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이 유익합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어날 때마다 피곤하니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합니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몸이 편하고, 좋은 것만 생각하지 않고,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에서 고기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고기는 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니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또 한쪽은 우상이 어디에 있느냐? 사시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먹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바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자신은 믿음으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결정의 이유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생각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 바울은 고기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면 자신은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께 더 필요한 일, 더 유익한 것을 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내게 이익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들은 어떻게 되든지 나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마음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기쁨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살맛이 납니다.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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