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애곡, 재앙의 말씀 - (에스겔 2:8~2:10)
양병모 목사님
참 부모를 알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안다고 하지만...
어릴 때는 부모님이 그 자녀의 이런 저런 것을 마련해 주시기도 하고 요구사항을 들어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식이 느끼지 못한 그 뒤안길에 혹은, 듣지 못했던 한숨소리를..
때로는 보지 못했던 슬픔의 모습을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자녀가 사 달라고 하는 컴퓨터를 마련해 주기위해 어떤 수고와 아픔이 있었는지...
어릴 때는 잘 모르다가 이제 성숙한 자녀가 될수록 알게 된다.
어릴 때는 기쁨과 평안을 보기에 아버지의 한숨소리, 때론 엄마의 말 못하는 슬픔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읽는다하면서도
참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내 요구조건이 이루어지는가? 안 이루어지는가?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즉, 내 필요중심의 요구조건, 나의 삶의 조건을 해결하고 회복시키는데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하는가? 이러한 내 입장에서 성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한 하나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점점 장성한 신앙이 되어 가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심에 대하여...
오늘 에스겔을 통하여 주신 말씀 속에서 먹으라고 주신 두루마리는 성경이다.
그 때 당시에는 *파피루스나, 양의 가죽, 곧 양피지에 쓰였던 것들의 형태가 두루마리였다,
* 파피루스(papyrus, 아랍어)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종이와 비슷한 매체로,
파피루스라는 이름의 갈대과의 식물 잎으로 만든다. 이 식물은 2~3m의 크기로
나일강 지역에서 자란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것을 받아먹으라고 하시는데 받아보니
거기 쓰인 내용이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8-10절,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바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안팎으로 빼곡히 씌여져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주신 66권의 성경책은 하나님자신을 드러내신 완전한 모습인데...
그 안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애가: 슬픔
2. 애곡: 울음소리
3. 재앙: 통곡소리
재앙은 어떤 어렵고 끔찍한 사건으로만 생각하면 그 정확한 뜻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히’라고 하는데
이 뜻은 ‘통곡’‘부르짖음’‘호곡(울부짖음)’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에스겔을 통하여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 참담함을 견디지 못하시는...
과연 정말 그런가? 오늘 에스겔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슬픔과 울음소리와 통곡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시는데....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본 사람은 예레미아와 에스겔이다.
특히 에스겔은 유다의 멸망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바벨론으로 끌려간 선지자다.
그는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이다.
그들이 끌려갈 때에는 지금처럼 포로대접? 그 어디 포로규정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그 때는 어땠는가? 모두 귀와 귀를 연결하거나 코와 코를 연결하여 끌려갔다.
그래서 바벨론 지역에 도착하여 보니 코가 없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귀 떨어진 사람이 많았다. 쇠꼬챙이로 연결한 귀들이 코들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또한 귀만 있고 사람은 떨어져나가 방울뱀이나 전갈에게 죽어버렸을 터다.
그런 것을 에스겔에게 다 겪게 했으니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며 아픔이었겠는가?
그런데 에스겔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자, 보자, 창세기에서부터...
1장에서 기쁨가운데 우리가 우리형상으로 사람을 짓자하며 얼마나 흥분하며 기뻐하시는가?
그런데 그 기쁨도 얼마지나지 않아 3장에 가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다.
그 때 하나님은 부르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고
이 때 하나님은 왜 너희들이 그런 일을 했느냐? 라는 슬픔 때문에
“왜 네가 내가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었느냐?”라는 뜻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답하나?
그 때 바로 무릎꿇어 “내가 잘못 했나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그는 뻔뻔스럽게 “무화과 나무 뒤에 숨었나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닌데...
이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아버지의 아픔이다.
아름다운 최고의 창조물로 만드셨는데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급기야는 4장에 가서 가인으로 가서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푸욱 쑤신다.
“가인아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했을 때...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거짓말을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 것이다.
자식이 머리가 굵어지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대든다.
말대꾸를 하는 것도 그런데...이럴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아주 참담해 지는 것이다.
창세기 6장에 가면 네피림들이 나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의 사람, 그 품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겉의 보이는 것의 있고 없고 높고 낮고 가 아니라
하늘의 자존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데 이들이 세상 문화속에 들어가 살면서 네피림을 만들어 내지 않나?
밖으로 그럴듯한 사람들이다...많이 갖고 세상것을 누리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 네피림 앞에서 하나님은 이제 창세기 6장 6절에 가면,
하나님께서는 사람 만드신 것을 한탄하사...
한탄하신다. 찢어질듯한 아픔, 곧 애곡이다. 그래서 급기야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망가트릴 수 밖에 없었다.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이르는 말씀은 노아홍수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해보라, 정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렸는데 마지막 한귀퉁이가 맘이 들지 않는다.
작가의 혼이 들어간 그림인데...그럴 때 그것을 칼로 찢어버리는 작가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정말 정성스럽게 만든 도자기가 있는데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들지 않아 그것을 깨어 버려야 하는
그 도공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사건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분노하신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통곡소리가 있는 사건이다.
우리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
우리는 그 분께 아주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품은 동일한 규격에 같은 품질로 진열되어 있지 않나?
소모되어 버리기도 하고 다른 물건으로 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작품은 일률적으로 하지 않으며
각기 독특하며 그것이 제 역할로 있지 않을 때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찢어버리고 깨트리는 아픔을 감수하고 다시 재 창조를 해야 한다.
그 홍수로 쓸어버리셔야 했던 창조주의 아픔을 아는가?
이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시는데
특히 아브라함에게 감동받아서 “너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해 주셨던 것은
아브라함이 바로 아버지의 그 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슨 마음인가?
언젠가 아버지가 당신의 그 마음을 똑같이 지니고 똑같이 죽음을 당하게 될
그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해 준 사건을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사건,
이것을 유대인들은 이미 이삭은 거기서 죽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아께다’라고 하며
“이미 이삭은 재가 되었다” 라고 한다.
아버지의 아픔을 아브라함이 보여 준 것이고 이삭은 그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의 순종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슬픔, 그 울음소리가 나중에는 먼 훗날 골고다 언덕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시기로 섭리가운데 작정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고난 받고 있을 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들의 고통을 들었고, 보았고, 기억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이 모든 그들의 고난의 광경을 하나님은 그냥 태연하게 보고 즐기고 계셨겠는가?
그런 부모가 있는가?
자식이 타지에 가 있는데 제대로 돈도 못 보내주니 자신이 어렵게 학비를 벌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부모가 마음이 편할까....?
아버지의 마음은 슬픔가운데 400년을 지내신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모세를 통하여 이끌어 내신다. 그리하여 광야 40년만 견디어 내면 되는 것이다.
“이 40년만 견뎌다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디지 못한다. 끊임없이 반역한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여주는데도 조금만 어려우면 “하나님 어디갔어?”
마치, 어린아이를 아버지가 무등을 태운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위에서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빠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분명히 손 잡고 밑에 무등 태우고 있는데 아빠가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이시며 광야 40년을 그들과 같이 걸어가신 것이다.
같이 순례의 길을 가신 것이다. 같이 그 뜨거운 한낮에 불볕더위에 계셨고 그 추운 밤을
같이 지내신 것이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을 힘들고 아프게 했던 것은,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바란광야에서다.
그들이 가네스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꾼 12명을 보내지 않나?
그 중에 두 명이 제대로 보고했고 열 명은 무어라 했나? “큰일 났다,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
그래서 그 날 밤 그들이 무얼했나?
축제? 합심기도? 그 자리에 안 계셨나?
그들은 통곡했다. 안타깝게도 모세도 같이 통곡했다. 이 순간 아버지의 마음을 어떠셨겠는가?
아버지도 같이 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물은 다른 것이다.
그들은 광야 40년을 통하여 15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한다.
마침내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1세들이 다 죽은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2세들과 함께 언약궤를 앞세우고...
이 때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닦으시며 자식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시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도 잠시잠깐이고 곧 지나지 않아
그 땅의 풍요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에게 결탁하지 않나?
그들이 하나님을 제켜놓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선민사상은 이상한 자부심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더 깊숙이 디밀고 있는 것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디밀고 있는 그 한쪽 발이다. 이것이 또한
교회에 나와 있지만 한 쪽발은 세상에 깊숙이 디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놓으라 하시고 끊임없이 포기하라고...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데
힘들기에 그렇다. 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한쪽 발을 디밀고 있는 것, 이것이 간음이다.
한 남편이 “나만 섬기고 살수 없니?”라고 찾아오셔서 결혼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고멜과 같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고 하며 “나하고만 살자”라고 하시는데
시간이 나면, 살만하면, 배가 따뜻하면 떠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픔이고 바로 간음이다.
참 간음은 당신은 나의 남편이야, 라고 하면서
세상의 도덕, 윤리, 철학 그것이 생명인 것인야, 무엇보다도 재물이, 돈이 생명인 것인양,
붙잡고 있는 것이 간음이다. 그런 생각들, 그런 사상들, 그런 기복신앙적인 생각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주와 지지난 주를 통해 예레미아로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나눠보았다.
아버지의 본심이 무엇인가? 징계와 회초리가 아버지의 본심인가? 결국 그 징계와 회초리는
아버지의 마음에 접목되는 거룩을 위한 과정일 뿐,
그러나 예레미아애가는 역시 슬픔의 노래다.
그래서 1장1절에서도 “슬프다...”2장 1절에서도, 그리고 3장에서는 다른이야기를 하지만
4장 1절에 가서도 또 “슬프다...”라고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선지자 예레미아가 담아서 전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을 선지자라 한다.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은 애가이다.
나아가서 애곡이고 통곡소리다.
우리는 이러한 선지자의 눈물을 구하고 또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
자신은 물론 시대의 아픔에 아버지의 눈물을 담아 울어야 한다.
아버지가 우시니 자식 된 도리로 그 문 앞을 얼른 지나치거나 못 들은체 하지 않고
아버지의 눈물이 부담스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아버지와 일치하는 눈물과 그 마음을 지니기 위해
아버지 앞에 진실한 자녀로 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예수님처럼
눈 두 개 코 하나 달린 분이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그 말씀은 곧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라고 하심은 마음이 하나라는 것이다.
생각이 하나이고 내용이 하나라는 것, 더 정확하게는 말씀이 하나라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말씀이다. 그리하여 내용이 같은 것,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내용이 같아지는 것이다. 안의 것이 같아지는 것,
즉, 생각이 같아지는 것이다. 생각이 같아지다 보면 그것이 표출되는 말이 같아지게 된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하는 것을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말이 같아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예수님께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때로는 병든 사람, 불구자들을 보며 표현하신 것이 있다.
“불쌍히 여기사, 민망히 여기사...”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아버지의 애가, 애곡, 통곡의 마음이다.
같이 슬퍼하는 마음, 이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또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신 것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탕자의 비유이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나갔을 때 대문을 잠그지 못한다. 잠을 청할 수가 없다. 혹여 기척이 올까하여...
그 아들이 돌아올 때도 그 기쁨이 너무 크니 아린 아픔이 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나? 언젠가 남북이산가족 상봉프로그램의 장면들....
모두 운다. 기쁨이 너무 크기에...
복음서에 예수님이 우신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우선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이 우신다. 우리는 그 울음이 어떤 울음인지를
같이 나누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인생이 불쌍해서 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영원한 존재로 만드셨는데...영원을 살아야 할 인생들이
하루살이처럼 살고 죽음에 슬펴하는 그 모습...그 안타까움이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신다. 눅19장,
이미 주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셨기에 AD 70년에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폐허가 되지 않나?
그것을 미리 내다 보시며 우신 것이다. 단순히 그 사람들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징적인 존재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무너트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전 자체이신 주님이 오셨기에 이제 자신을 통하여
그 성전은 이제 심령성전, 마음의 성전인 것을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기에
이끌고 가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상징이었던,그들의 모든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을 무너트려야 하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이 또 우신 적이 있다. 우신 적이 아니라 많이 우셨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우셨다는 내용이 나오진 않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마에 피와 땀이 떨어진다.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 슬픔의 애가? 애곡? 의 기도를 하셨을까?
통곡의 기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겟세마네 기도다. 심한 통곡이다. 이 신적인 울음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아픔이다.
자식의 죽음 앞에 부르짖는 어머니의 아픔일까?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신 주님의 모습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두워진다. 더 이상 그 모습을 하나님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가리신 것이다. 그래서 온 땅이 진동한다. 아버지의 떨림이다.
“내 아들의 죽음을 차마 내 견딜 수가 없구나...”하는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너는 나의 아픔을 보여주었구나, 너는 나의 마음을 같이 느껴주었구나...”
그래서 여호와 이레, 그 일 이후에 아브라함과 그 엄청난 메시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이토록 아버지는 애가와 애곡과 통곡의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오신 분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지나간 과거의 일인가? 이제 아버지는 웃으실 때가 되었는가?
웃으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련해 드렸는가?
안타깝게도,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부르짖고 계시다고 하지 않는가?
로마서 8장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제대로 한다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 최선을 다해 한다면 어찌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겠는가?
자식들은 모른다. 커 보아야 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신앙의 장성자가 되어야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철이 든 자식은 엄마가 울 때 들어가 같이 우는 것이다.
“엄마 그렇게 힘들어... 엄마 무엇이 그렇게 아파?”가서 같이 울어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울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6:21절,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지금 울라고 하신다.
그 위에 보면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티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가난한 심령, 그런 사람이 울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식이 울 수 있다.
그것이 가난한 자다.
울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식은
25절에 보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러한 자들은“나는 괜찮다고, 나는 이 정도면 됐어”하는 신앙에 교만함을 가진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늘 아버지는 뭔가 채워주시는 분,
문제해결을 해 주시는 분, 이런 분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그 아픔을 모르니 울지 못한다.
바로 배부른 자들이다. 그리하여 너희들이 지금 울지 않으면 언젠가 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짧은 이 때에 웃고 영원한 그 때에 웃는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꾸로 살아서는 안 된다.
누가복음 7장을 보자,
32절,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무슨 말씀인가?
장터는 교회이며 피리를 부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정확한 음으로 피리를 불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이렇다고, 아버지의 마음이 이렇다고 정확하게
피리를 불어도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하지 않고 정녕, 울어야 할 때에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눈물의 장소에 가는 것이다. 초상집에...
그런데 우매한 자는 잔치집에 간다고...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울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23장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울라고 하시나?
곧 징계가 있는 것이다. 이제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 되지 않나?
우리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때론 망각하고 알더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다.
아니, 곧 다가오는 것을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넘겨드리고 그런 싶은 속성이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늘 기쁨만 주겠다. 호강시켜 주겠다. 내가 어렵게 살았으니 너희들은 잘 살아라...”
그러나 고생해보아야 한다. 자식들도 울어보아야 한다. 어려움을 겪어보아야 하고 부모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장한다. 젊었을 때 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식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부모가 가지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4장8-9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그렇다고 고난당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우는 마음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울라고 하는가?
두 마음을 품은 것 때문에 울어보라고 하신다.
6절에 보니, 교만한 마음 때문에 좀 울어보라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끊임없이 교만한 마음이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4절, 간음한 것 때문에 한 번 울어보라는 것이다. 참 남편이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
누룩을 먹었던 것, 지금도 참 남편외에 요구하고 있는 것 때문에 좀 울어보라는 것이다.
즉, 거룩하지 못한 더러움 때문에 울어보라는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울 때도 자식이 좋은 학교를 못 가서, 제대로 직장을 못 구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에게 제대로 하나님을 심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울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주로 눈물 흘리는가?
야고보서 5장에서도 보면 1-3절에서도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부한 자들아, 울라...
재산적으로 환경적으로도 넉넉한 사람은 잘 울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울리려고 결심하시고 물질, 건강을 앗아가시기도 한다. 때로는 갈등을 조성시키기도 하신다.
오늘 한 사람, 다윗의 이야기를 하며 말씀을 맺으려고 한다.
다윗은 많이 운 사람이다. 다윗은 한 형제같이 지낸 요나단의 죽음앞에 운다.
그 못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 받고 통곡하며 운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운다.
그 우는 마음을 시편 6편에 이렇게 표현한다.
6-9절,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울음의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 울음소리에는 반성과 통회의 눈물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과
갈망함의 마음이 있는 눈물이다.
다윗은 이렇게까지 표현한다.
시편 56편 8절,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눈물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 앞에 가면 행위를 기록된 것이 있고 또 하나 꺼내 놓는 것이 눈물병이다.
눈물병에 눈물이 얼마나 있는가?
그러나 또한 눈물의 성분도 검사한다는 것을 또 알아야 한다.
눈물병은 찼는데 불순물이 다 빠지고 정제되고 보니 빈병...?
눈물의 종류가 있다.
어떤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정제된 눈물인가?
다윗은 눈물병을 지닌 사람이었다.
로마시내를 태우면서 “얘들아, 눈물병 가져와...”
그 네로의 눈물병...? 영화에서 보지 않았나? 이런 눈물병 말고...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 받아서 나의 참 모습을 바라보고,
또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시대를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한 영혼을 향하여 우는 눈물....
그런 눈물을 흘릴 때에 하나님은 시편 126편에 처럼,
눈물로 씨 뿌리려 나가는 자들은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하시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기도다.
눈물로 씨를 뿌릴 때에 그 씨앗들, 곧 하나님의 말씀들이 내 안에서 위로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것이다.
이제, 우리 웁시다.
아버지가 뛰어 나오실 때에 탕자를 붙잡고 아버지가 우신다.
아들도 운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이제야 돌아왔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얼싸안은 눈물...
그것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사람, 맏아들은 자리에 참여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 맏아들은 그렇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달려와서 동생과 아버지를 붙잡고
같이 울어주었어야 했다.
지금 울 때에, 영원한 기쁨 가운데서 웃음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신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 받아서 웁시다. 내 모습 깨닫고 가난한 심령되어서
울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아버지의 눈물을 덜어주는 사람이다.
그러한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눈물을 우리에게 채워주소서.
당신의 아픔을 우리에게 새겨주소서.
아버지여,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매일 죽으므로
매일 부활하는 새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자신과 자녀와 이웃, 세계 땅 끝을 향하여
영혼들을 품고 당신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친히 열어놓으신 그 하늘 길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모쪼록 아버지의 기쁨이 되어
그 포로 된 자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우리 입술에는 찬송과 웃음이 가득 차게 하소서.
눈물로 뿌린 씨앗의 단을 거두는 추수의 나날을 주소서.
무엇보다도 보이는 성취에 앞서 성령의 열매,
그 인격의 결실이 먼저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인격을 마음껏 표현하기에
우리를 도와주소서, 더욱 교훈하시고 지도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사용하여 주소서, 우리교회를 긴요히 쓰소서.
아버지여,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가득 부어 주시고‘
당신의 눈물을 우리 눈동자에 담으사
당신의 사랑으로 촉촉히 젖는 마음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의 추수꾼들로 삼으소서.
감사드리며 주께서 이루실 일들을 고대하며 기대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