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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4일[화] - 인간의 반항기질

아맞다~ 2009. 8. 4. 19:39

2009년 8월 4일[화] - 인간의 반항기질       
 
 
 
 
인간의 반항기질  본문말씀 : 요한복음 7: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말씀 묵상]


      
사람에게는 반항기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일종의 본능적인 충동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아담이 물려준 좋지않은 유산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가장 악랄하게 반항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소개했을 때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했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 받은 사람들은 아픈 곳을 찔리자 이성을 잃기 시작했습니다(7절). 지금 예수님의 처지는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신 상황과 같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어떻게 반항하는 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선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렇게 4사람의 예수의 형제들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이들은 30년 가까이 한 지붕에서 예수를 보았으면서도 그 분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5절). 2년 동안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들을 보았음에도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시 69:8)" 말씀 그대로입니다.



또 예루살렘에는 논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학벌로 흠잡는 사람이 있었는데(15절)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16절).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행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그들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몸을 온전하게 고쳐주는 것은 더욱 죄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하십니다(23절).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항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고 교회사를 살펴보십시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따질 수 없을 것입니다. 논쟁하기 보다는 믿고 순종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매우 악질적인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아예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유대나라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1절부터 "죽인다, 귀신 들렸다, 잡아라." 섬짓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는데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는 사람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아쉬움은 있습니다. 왜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현대교회에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손해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자니 애매모호한 처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보며 배워야만 합니다.



모두 주님을 떠나고 배신하는 그때에 베드로는 주님 곁에 남고자 했습니다. 모두가 떠나가는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6:68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 외에는 갈 곳이 없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반항심을 꺾고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들은 빛을 보지 못해 실명하고 먹지 못해 몸이 오그라 들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겉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고 속으로는 논쟁하고 반항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베드로처럼 고백하고 예수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도 갈 곳이 많다며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암흑기 같은 이 시기에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며 예수님처럼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반항해도 담대하게 외치는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외치면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님의 요한복음강해(1995.5.12)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오늘의 기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는 믿으을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