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뿔에 기름을 채우라(필라델피아초대교회 이응도 목사님)
* 본 문 : 사무엘상 16장 1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 제 목 : Proactive Life - 3. 너의 뿔에 기름을 채우라!
지난 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다면 아마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죽음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의 죽음과 추모 공연을 보면서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는 달리 그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그가 약물 중독 혹은 과용으로 인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보도하고 있고, 또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대중에게 둘러싸여 환호와 비명 속에 공연을 했지만 정작 그가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에는 약물에 의지하여 외로운 싸움을 했던 것입니다.
왜 세계적인 명성과 부와 성공을 얻고도 그는 외롭고 힘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없었을까요? 그가 보여주었던 독특했던 삶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두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했었습니다. 첫째는 아동이었고, 둘째는 성형이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대로 그는 ‘Never Land'라는 여의도보다 큰 자기만의 성을 만들고 그곳에서 어린이들과 애완 동물들과 함께 살고자 했습니다. 또 성형에 집착을 보여서 나중에는 얼굴 전체가 무너질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버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 연구한 결과 대체적으로 그의 과거의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Jackson F라는 그룹으로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말보다 춤과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할만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11세에 이미 스타가 되어버렸고, 이후 그는 유소년기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습니다. 대중 앞에서는 노래와 춤을 보여했습니다. 유소년기에 경험해야 할 친구들과의 시간과 부모의 따뜻한 사랑은 노래하고 춤을 추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유소년들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성장하면서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이 싫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억은 자신을 다그치고 훈련시키는 엄한 코치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을 주는 아버지가 아닌 노래와 춤을 추는 기계를 만들어 돈을 벌려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성형에 집착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었습니다.
혹 여러분들도 보셨습니까? 그를 추모하는 공연에 정말 유명한 가수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 혹은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에 동참했습니다. 그 중 저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던 몇몇 노래가 있습니다. 공연을 시작하고 제일 먼저 머라이어 캐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I'll be there.”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가 참 좋더군요. 어떤 어려움이 있거나 고통이 있어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노래의 마지막에 "Thank you, Jesus!"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라이오넬 리치가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불렀느데, 제목이 “ Jesus is Love.”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항상 자신의 마음 속에 있고, 자신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눈물을 흘렸던 대목은 제니퍼 허드슨이라는 여가수가 나와서 “ Will you be there?”라는 노래를 부를 때였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눈물 흘리며 고통당할 때 바로 그곳에 함께 해 달라는 가사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노래를 발표할 때 아직 소년이었던 마이클 잭슨의 육성이 다음의 가사를 호소력있게 전달합니다. (24:28 - 28:38)
In our darkest hour 우리가 삶에 지쳐 있을 때
In my deepest despair 내가 깊은 절망 속에 있을 때
Will you still care 날 돌봐주시겠어요?
Will you still there 당신이 그곳에 계시겠어요?
In my trials, In my tribulations 우리의 불신과 좌절 속에서
Through our doubts and frustrations 내가 고난과 시련에 빠져 있을 때
In my violence, In my turbulence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Through my fear and confessions 내가 분노와 혼란에 빠졌을 때
In my anguish and my pain 기쁨과 슬픔 속에서
Through my joy and sorrow 화가 나거나 고통을 받을 때
In the promise of another tomorrow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면서
I'll never let you part 당신을 떠나게 하지 않겠어요
For you are always in my heart 당신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기에
제가 안타까웠던 것은 그가 과거 자신의 잃어버렸던 세월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불렀던 노래들, 자신이 외쳤던 메시지에 집중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는 ‘Heal the world’ 를 노래했지만 스스로의 아픔과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고, ‘We are the world’를 노래했지만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했습니다. 희망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내일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유년의 시간들과 마음에 남은 상처에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는 성장하지 못한 아이로 세상의 주변을 떠돌게 되고,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약물과 돈으로 평안과 위로를 사기위해 발버둥쳤습니다.
1.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이번 주 긍정의 힘을 읽으시고 묵상하실 내용 중에는 마이클 잭슨이 읽었으면 좋았을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공평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죄와 악과 어리석음이 개입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더 어리석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평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그 불공평성에 내 마음과 삶을 집중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전에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으로 오늘을 해석하고 현재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더 어렵습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가끔 상담을 하면서 DISC검사를 합니다. 또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진 기질을 점검하기도 하고, 살아온 삶을 통해서 그의 내면에 남겨진 상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검사를 하면 상담자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마치 점쟁이처럼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드는 패턴, 혹은 문제가 생기는 영역, 또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들을 맞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 통계에 의해서 그런 유형의 사람은 그런 방식의 습관과 행동의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위 ‘책에 나온대로’ 말해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성 검사 혹은 적성 검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발생합니다. “아... 내가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그런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급하고 콘트롤하는 사람이라잖아. 당신이 나를 좀 이해해야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나와 같은 성격이어서 내가 어릴 적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잖아. 어쩔거야... 내가 이런 사람인데... 그러니까 나를 좀 더 이해하라고!”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달려들고 도전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는 모든 사람과 싸울 수 있는 것이 또한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사람들은 과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의 가치와 미래의 비전에 자신을 맞추면 과거의 상처와 아픔은 쉽게 잊고 극복할 수 있을텐데, 계속 자신의 과거의 문제에서 스스로 벗어나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마이클 잭슨과 같이 좋은 노래를 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지만 정작 자신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점점 더 어려운 삶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고, 눈물과 분노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분노와 상처에 얽매여 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살 수 없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우리의 인생이 더 이상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을 주장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내일을 맡기고 의지하며 우리의 과거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집비둘기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과거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청년들과 함께 Kosta를 오고 가는 길에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그 중에 Cushion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책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환경과 자극들, 그리고 나의 반응에 대한 지혜를 구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비둘기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법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신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뱉은 부정적인 말들 쏟아냈던 악한 감정들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저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쏜 독이 묻은 화살은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삶의 환경은 그리 안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과 하지 않을 일로 고통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많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발견하라.” 내게 다가오는 자극이 얼마나 부당한지,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지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부당하고 악한 자극을 준 대상과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말과 감정을 쏟아내는 것도 어리석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올 뿐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3. 나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쿠션의 저자는 그는 자극에 대해 자유로운 반응을 하기 위한 4가지 지혜를 독자들에게 제공합니다.
첫째, 삶에서 객관적인 사실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그 일에 대한 자신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대해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자유를 가진 존재입니다.
둘째,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셋째, 자극과 반응의 공간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상황에 떠밀려 만성적인 수동성에 길들여진 채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반면에 선택할 자유를 발견한 사람은 불쾌하거나 절망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에도 선택을 통해 그 상황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이러한 네 가지 지혜에 대해 정확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머니 없이 성장해야 하는 유년기와 형들로부터 부당한 미움을 당했던 소년기, 그리고 억울하게 노예와 죄수로 살아야 했던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비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요셉만큼 어렵고 힘든 환경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 원망, 비관, 절망...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가 힘들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요, 고통과 고민이 없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런 단어들이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약속, 꿈과 비전 등의 말들을 붙들었습니다. 그 말들이 자신의 마음과 삶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요셉은 자신이 만난 고난의 환경과 자신의 반응 사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환경과 반응 사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Cushion의 저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삶의 쿠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쿠션이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딱딱한 자극에 내게 부딪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나와 자극 사이에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장치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자극과 우리의 반응 사이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쿠션의 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다가온 불행, 형들의 악행, 연이은 고난에 대해 즉각 억울함과 분노와 증오의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자신의 선택이라는 쿠션을 주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첫째, 그는 분노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했지만 요셉은 악해지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함께 악해졌다면, 복수는 이뤄졌으되 요셉은 승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셉에 대해 하나님은 패배한 것이요, 사탄이 승리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혹 징계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합니다. 형들과 형들의 모든 가족을 책임집니다. 형들은 실패했지만 요셉은 지금 승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분노가 아닌 용서를, 증오가 아닌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자극과 연약한 자신 사이에 용서와 사랑이라는 쿠션을 삽입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요셉과 그 모든 가족들에게 충만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규원이라는 시인이 쓴 ‘만물은 흔들리면서’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무를 흔드는 바람은 오히려 나무에게 고마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 나무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나무를 튼튼하게 하고 잎을 무성하게 하며 그 생명력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또한 이런 원리 속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이해되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서 우리를 고난 속에 몰아 놓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규원 시인이 발견한 것처럼 나무는 흔들리면서 든든한 줄기와 더욱 든든한 뿌리를 얻는 것 같습니다. 잎은 흔들리면서 더욱 푸르고 생기가 넘칩니다. 고난은 믿음으로 받으면 영양분이 됩니다. 시련은 믿음으로 이기면 영적 근육이 됩니다. 더욱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4. 너의 뿔에 기름을 채우라(삼상 16:1)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만나는 사무엘 또한 억장이 무너지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마음이 너무 슬프고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이 너무 깊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그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가 직접 기름 부어 세웠던 사울왕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교만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무엘은 사람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의 사역에 대해 용기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 인생...이제 마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원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게 뭡니까? 그는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 같습니다. 저는 쓸모없이 헛수고만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사람을 보니 분노스럽고, 하늘을 보니 눈물만 흐르고, 하나님을 생각하니 오히려 화가 납니다.”
어쩌면 사무엘이 지금 처한 상황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도, 하나님도, 환경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나는 인생에 보람도, 의미도 없이 이렇게 사라져 갈 것 같습니다.
“하나님, 믿기만 하면 복주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면서요... 그런데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왜 하는 일마다 이렇게 안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낙심하고 쓰러져 있는 사무엘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 치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쓰러져 있는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의 뿔에 기름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쓰러져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를 하나님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실패했으므로 앞으로 다른 사람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의 뿔에 기름을 채우라!” 나는 아직 네가 실패했다고, 의미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일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으니, 너는 나의 명령을 따라 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원래 설교의 제목은 ‘꺼꾸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미지 하나를 계속 떠올렸습니다. 나무 한 그루입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행해 가지를 뻗칩니다. 하지만 이런 나무를 한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땅을 향해 가지와 잎과 열매를 뻗고 있는 나무 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와 교회의 삶이야 말로 이렇게 거꾸로 사는 삶 - 땅에 소망과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과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과거에 얽매이게 되고 분노와 절망과 원망의 삶을 살게 되지만,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으로부터 받는 모든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비전 속에서 오히려 천국의 풍성한 푸른 잎과 향기 나는 열매로 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사무엘에게 낙심이 아닌 소망의 기름을 그 뿔에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이은 고난에 절망하는 요셉을 붙드시고 나의 약속을 믿으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버거운 세상, 힘들고 어렵다고 호소하는 여러분과 저의 손을 잡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삶을, 이 땅에 아닌 하늘에 뿌리를 내린 삶을, 낙심과 절망이 아닌 소망과 감사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과 우리가 사는 세상 사이에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며 더욱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